부제 : 한 역사가가 이루지 못한 꿈, 그리고 그것을 이어받은 아들
들어가며 – 아버지가 남긴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기원전 110년, 한 무제는 태산에서 봉선 의례를 거행했습니다.
황제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리고 자신의 통치를 천하에 알리는 중대한 행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적인 의례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이었습니다.
사마담은 당시 태사의 직분을 맡고 있었습니다. 천문과 역법, 국가 의례에 관계된 일을 담당하던 사람이었지요.
그런 그가 자신의 시대에 벌어지는 중대한 국가 의례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사기』 「태사공자서」에 따르면 사마담은 주남에 머물러 봉선 의례에 참여하지 못했고, 이를 몹시 한탄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아들에게 그 아쉬움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사마담은 봉선 의례에서 무엇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요?
1. 봉선 의례에 참석하지 못한 역사가의 한탄
봉선은 단순히 황제가 산에 올라 제사를 올리는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천자가 하늘과 땅에 자신의 통치를 고하고, 제국의 질서와 권위를 드러내는 정치적·종교적 의례였습니다.
한 무제의 봉선은 한나라의 역사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렇다면 태사의 직분을 맡은 사마담은 그곳에서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을까요?
의례의 절차였을까요?
황제의 행동과 말이었을까요?
아니면 그 의례가 이루어지는 현장의 분위기와 국가적인 의미였을까요?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사마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는 있습니다.
천문과 역법, 국가 의례에 관계된 직무를 맡은 사람에게 봉선은 자신의 직분과 깊이 연결된 행사였습니다.
그가 의례의 형식을 문헌으로 알고 있었다고 해도, 실제로 그 자리에 참여하는 일은 다른 의미를 가졌을 것입니다.
기록으로 아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시대에 이루어진 중대한 의례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역사 속에 남겨야 한다는 책임감도 느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마담이 봉선 의례에 참석하지 못한 정확한 사정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병 때문에 태산에 오르지 못했다거나, 의례를 직접 기록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통함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한탄은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깁니다.
역사가에게 중요한 것은 사건을 아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사건이 일어난 시대를 직접 이해하려는 태도일까요?

2. 사마담은 왜 아들에게 태사가 되라고 했을까요
사마담의 유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내가 죽거든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어라. 태사가 되거든 내가 논하고 저술하려 했던 일을 잊지 말아라.”
이 말에는 두 가지 당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태사가 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역사 편찬의 뜻을 이어 달라는 것입니다.
왜 사마담은 아들에게 반드시 태사가 되라고 했을까요?
그저 가문의 관직을 이어받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을까요?
나는 그보다 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편찬하려면 무엇보다 자료가 필요합니다.
옛 문헌을 살펴야 하고, 여러 시대의 기록을 비교해야 하며, 서로 다른 전승 가운데 무엇이 믿을 만한 것인지 판단해야 합니다.
개인의 기억과 경험만으로는 방대한 역사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태사라는 관직은 천문과 역법 등의 직무를 맡는 자리였지만, 궁정의 문헌과 기록을 접할 수 있는 환경과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사기』에는 사마천이 태사령이 된 뒤 국가의 장서가 보관된 석실과 금궤의 서적을 살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사실은 중요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태사가 되라고 당부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역사 편찬에 필요한 자료와 학문적 환경을 확보하는 데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마담이 그러한 이유를 직접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태사라는 직분과 역사 편찬의 관계를 생각하면 충분히 검토할 만한 해석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관직 자체보다 그 관직을 통해 이루어야 할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3. 한 권의 책보다 더 무거운 유산
우리는 흔히 사마천이 아버지의 유언을 받아 『사기』를 완성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마담은 어느 정도까지 역사서를 만들어 놓았을까요?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목차까지 정해 놓았을까요?
아니면 역사 편찬의 방향과 구상을 세워 두었을까요?
정확한 범위는 알 수 없습니다.
사마담이 역사 편찬을 구상하고 옛 기록을 정리하려 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만, 오늘날 전하는 『사기』의 어느 부분이 아버지의 원고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마천이 아버지가 거의 완성한 책을 단순히 마무리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훨씬 어려운 과제가 남겨졌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평생 추구했던 학문적 목표를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판단과 능력으로 완성하는 일이었습니다.
자료를 모으는 일과 그 자료를 역사로 만드는 일은 다릅니다.
어떤 사건을 기록할 것인가.
어떤 인물을 역사 속에 남길 것인가.
서로 다른 기록이 충돌하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
한 인간의 성공과 실패를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가.
이 모든 판단에는 역사가 자신의 지식과 가치관이 개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마담이 아들에게 물려주려 했던 것은 단순한 원고나 관직이 아니라, 이러한 질문을 끝까지 감당해야 하는 역사가의 책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4. 아버지는 어떤 아들을 믿었을까요
그런데 여기서 다시 사마천이라는 청년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왜 그토록 중요한 일을 아들에게 맡기려 했을까요?
사마천은 어린 시절부터 옛 문헌을 공부했습니다.
스무 살 무렵에는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옛 유적과 전승을 접했고, 이후 낭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모두 아버지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마천이 일찍부터 학문과 세상 경험을 쌓아 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어쩌면 사마담은 아들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이루지 못한 일을 이어 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학문을 익히는 능력뿐 아니라 오랜 세월 한 가지 일을 지속할 성실함과 인내심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역사 편찬은 하루아침에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문헌을 읽고, 서로 다른 기록을 비교하며, 때로는 자신의 판단을 의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이 있어도 끝까지 버티지 못한다면 완성하기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렇다면 사마담은 아들에게서 그러한 자질을 발견했던 것일까요?
우리는 그 답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아버지가 자신의 학문적 사명을 이어받을 사람으로 사마천을 지목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 기대가 사마천에게는 얼마나 큰 무게로 다가왔을까요?
5. 아버지가 남긴 말은 왜 『사기』에 기록되었을까요
여기서 또 하나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사기』 「태사공자서」에 남겼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한 기록이었을까요?
사마담의 유언에는 봉선 의례에 참여하지 못한 한탄뿐 아니라, 가문의 역사와 공자의 『춘추』, 그리고 후세에 역사를 남겨야 한다는 당부가 이어집니다.
사마담은 자신이 태사로 있으면서 한나라의 군주와 신하, 의로운 인물들의 행적을 기록하지 못한다면 역사 기록의 전통을 저버리는 일이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이 대목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사마담이 두려워한 것은 자신의 죽음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완수하지 못한 채 역사의 기록이 끊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마천은 훗날 이 말을 자신의 저술에 남겼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마천의 또 다른 의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기록함으로써 자신이 왜 이 방대한 역사를 쓰게 되었는지, 그 일이 어떤 전통과 책임에서 출발했는지를 후세에 설명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더 나아가 자신이 역사를 기록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암시하려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사마천의 명시적인 저술 의도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언이 『사기』의 마지막 편인 「태사공자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읽을 대목이 아닙니다.
독자는 방대한 역사를 읽은 뒤, 그 역사를 쓴 사람이 어떤 사명을 이어받았는지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그때 비로소 앞서 읽은 기록들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6. 아버지가 보지 못한 것을 아들은 기록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사마담은 한 무제의 봉선 의례에 참여하지 못한 일을 한탄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완성한 『사기』에는 「봉선서」라는 독립된 편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고대의 봉선 전승부터 진시황과 한 무제의 봉선, 국가 의례와 신선 사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직접 참여하지 못했던 의례가 아들의 역사서에는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한 의도적인 선택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봉선서」를 단순히 아버지의 유언 때문에 집필했다고 볼 근거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기록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의미가 떠오릅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보지 못한 역사적 사건을 안타까워했고, 아들은 그 사건을 포함하여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를 후세에 남겼습니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건도 여러 기록과 전승을 검토하여 역사로 남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모든 사건을 직접 보았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얼마나 성실하고 비판적으로 다루었느냐일 것입니다.
사마담이 아들에게 물려준 역사 기록의 책임도 결국 이 문제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7. 3년 뒤, 사마천은 태사령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뒤, 사마천은 태사령이 되었습니다.
『사기』는 그가 태사령이 된 뒤 국가에 보관된 문헌들을 살폈다고 기록합니다.
그 3년 동안 사마천이 무엇을 공부하고 준비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한나라 초기의 법률 자료인 『이년율령(二年律令)』 「사율(史律)」에는 사관 계통의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문자 지식과 서체를 시험하는 규정이 등장합니다. 『사주편(史籀篇)』을 비롯한 문자 학습과 수천 자에 이르는 글자에 대한 지식, 여러 서체를 다루는 능력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기록을 담당하는 관리에게 상당한 수준의 문자 지식과 전문 교육이 필요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가 별도의 시험을 거쳤는지, 다른 관직에서 승진했는지, 아버지의 직분을 계승하는 방식으로 임명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고문을 익히고, 천하를 여행하며 역사적 지식을 쌓았으며, 훗날 천문과 역법, 역사 편찬에 참여했던 그의 생애를 보면 상당한 학문적 역량을 갖춘 인물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한 역량은 타고난 재능만으로 이루어졌을까요. 아니면 아버지의 가르침과 오랜 학습, 끊임없는 탐구가 만들어 낸 결과였을까요.
당시의 관직 임명 제도와 상례 등을 생각하면, 3년이라는 기간을 태사령이 되기 위한 특별한 시험 준비 기간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결국 아버지에게 했던 약속을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사마천은 아버지의 일을 밖에서 바라보는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을 자신의 직분으로 수행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남긴 학문적 구상을 이해하고, 필요한 자료를 살피며, 자신이 기록할 역사의 범위를 정해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을 듣던 날에는 막연하게 느껴졌을 책임이 이제 구체적인 과업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천이 그 일을 단순히 의무감으로만 수행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학문을 익히고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세상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쌓아 왔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사명이 자신의 학문적 열망과 만나는 과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때부터 사마천에게 역사 편찬은 단순히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평생 이루고자 하는 일이 되어 갔던 것은 아닐까요?
마치며 – 같은 사명은 끝까지 같은 의미였을까요
우리는 여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한 청년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그에게는 존경하는 아버지가 있었고, 오랫동안 익혀 온 학문이 있었으며, 장차 완성해야 할 역사 편찬이라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은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책임으로 묶어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나 처음의 마음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믿었던 가치가 흔들릴 때도 있고, 존경했던 권위가 자신을 실망시킬 때도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도 처음 품었던 사명은 그대로 남아 있을까요?
아니면 그 사명을 이어 가는 이유 자체가 달라질까요?
훗날 사마천은 이릉 사건으로 인해 황제의 노여움을 사고, 궁형이라는 치욕을 겪게 됩니다.
그 사건이 그의 내면을 얼마나 바꾸었는지는 쉽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이전부터 비판적인 시각이 있었을 수도 있고, 시련 이후에도 끝내 변하지 않은 가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만큼은 남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사마천에게 역사 편찬은 존경하는 사람에게서 물려받은 사명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믿었던 질서가 무너지는 경험을 한 뒤에도, 그 사명은 여전히 같은 의미였을까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시작한 일이, 언젠가 자신이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될 수도 있을까요?
우리는 앞으로 사마천의 삶을 따라가면서 이 질문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