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갈리아의 승리자는 왜 로마로 돌아갈 수 없었을까

라벤나에서 기다리는 카이사르 이미지

들어가며 — 전쟁에서 이겼지만 돌아갈 곳은 멀어지고 있었다

기원전 52년, 갈리아의 알레시아에서 카이사르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갈리아 부족들을 결집하여 로마에 저항했던 베르킨게토릭스가 항복했다. 수년에 걸친 갈리아 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승리 가운데 하나였다.

카이사르는 이제 로마에서 누구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장군이 되었다. 그가 거느린 군단은 오랜 전쟁을 통해 단련되었고, 그의 이름은 로마의 속주를 넘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카이사르의 영향력이 커지는 동안, 정작 로마에서는 그를 지탱하던 정치적 관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한때 그와 권력을 나누었던 사람들은 더 이상 예전의 동지가 아니었다. 로마의 원로원에서는 그의 귀환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그가 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요구도 거세지고 있었다.

갈리아에서 승리한 장군은 왜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는 일을 걱정해야 했을까.

그 사정을 이해하려면 알레시아의 승리보다 조금 앞선 시기로 돌아가야 한다.

1. 세 사람이 지탱했던 권력 — 삼두정치의 시작

기원전 60년 무렵, 로마에는 서로 다른 힘을 가진 세 사람이 정치적 협력 관계를 맺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였다.

폼페이우스는 동방 원정에서 거대한 군사적 명성을 얻은 장군이었다. 크라수스는 막대한 재산과 정치적 인맥을 가진 인물이었다. 카이사르는 뛰어난 정치적 능력과 야심을 지녔지만, 아직 두 사람에 견줄 만큼 확고한 군사적 기반을 갖추지는 못했다.

세 사람은 각자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동방 정책을 승인받고 퇴역 병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기를 원했다. 크라수스는 자신의 재정적 이해관계와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에 오르고, 그 이후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보장할 지휘권을 얻고자 했다.

이들의 협력은 오늘날 말하는 공식적인 삼인 공동정부가 아니었다. 로마의 기존 정치제도 안에서 서로의 이해관계를 지원하기 위한 비공식적인 권력연합이었다.

기원전 59년 카이사르는 집정관이 되었고, 이듬해부터 갈리아 지역의 군사 지휘권을 맡았다.

기원전 56년에는 루카에서 세 사람의 협력이 다시 확인되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다음 해 집정관에 올랐고, 카이사르의 갈리아 지휘권도 연장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은 세 사람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때 유지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공통의 정치적 이상만큼이나 각자의 권력과 명예가 중요했다.

그리고 그 균형을 지탱하던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율리아의 죽음과 통곡하는 폼페이우스, 그리고 카이사르의 슬픔과고뇌의 이미지
율리아의 죽음과 통곡하는 폼페이우스, 그리고 카이사르의 슬픔과 고뇌를 상상하여 그린 그림(AI 이미지)

2. 두 사람을 이어주던 율리아 — 정치와 가족의 경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관계에는 정치적 협력 외에 특별한 연결고리가 있었다.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였다.

기원전 59년 무렵 율리아는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보다 여섯 살가량 연상이었으며, 이미 로마에서 큰 명성을 누리고 있던 장군이었다.

그 결혼은 두 사람의 정치적 동맹을 더욱 굳건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단순한 정략결혼으로만 볼 수는 없다. 플루타르코스 등 후대의 기록은 폼페이우스가 율리아에게 깊은 애정을 품었다고 전한다.

기원전 54년, 율리아가 출산과 관련된 과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죽음은 폼페이우스 개인에게 큰 상실이었으며,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연결하던 가족적 유대가 사라지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율리아의 죽음이 곧 두 사람의 결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정치적 협력은 한동안 더 이어졌고, 두 사람이 반드시 적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이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해 주던 중요한 연결고리가 사라진 것은 분명했다.

로마의 정치는 혈연과 혼인, 우정과 후원 관계가 정치적 동맹과 긴밀하게 얽혀 있는 세계였다.

율리아가 살아 있었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달라졌을까.

역사는 그 질문에 답해 주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죽음 이후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정치적 이해관계가 점차 더 중요해졌다는 사실은 살펴볼 수 있다.

3. 크라수스가 사라진 자리 — 세 사람의 균형이 무너지다

율리아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기원전 53년, 삼두정치에 또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에서 참패한 것이다.

그는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뒤 동방의 강국 파르티아를 상대로 군사적 성과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카르헤 전투에서 로마군은 파르티아의 기병 전술에 크게 패했고, 크라수스도 목숨을 잃었다.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던 크라수스는 그렇게 동방의 전쟁터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삼두정치의 권력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서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제삼의 세력이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완전히 압도하기 어려운 정치적 균형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제 그 균형을 이루던 한 축이 사라졌다.

갈리아에서는 카이사르가 군사적 명성을 쌓아 가고 있었고, 로마에서는 폼페이우스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협력이 유지될 가능성은 남아 있었지만, 동시에 서로를 경쟁자로 의식할 이유도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로마에서는 폼페이우스의 정치적 지위를 크게 바꾸어 놓는 사건이 벌어졌다.

삼두정치인 크라수스의 죽음과 집정관이 된 폼페이우스
삼두정치인 크라수스의 죽음과 집정관이 된 폼페이우스의 모습을 상상으로 그린 그림(AI 이미지)

4. 동맹에서 경쟁자로 — 폼페이우스는 왜 원로원에 가까워졌을까

기원전 52년 로마의 정치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정치인들의 경쟁은 거리의 폭력으로 번졌고, 호민관 클로디우스가 정적 밀로의 추종자들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 이후 로마에서는 소요가 일어났고, 원로원 회의장으로 사용되던 건물마저 불탔다.

정치적 질서를 회복할 강력한 인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때 원로원이 의지한 사람이 폼페이우스였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52년 동료 집정관 없이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공화정의 통상적인 집정관 제도와 다른 예외적인 조치였다.

한때 카이사르와 손잡고 원로원 내 반대 세력을 압박했던 폼페이우스가 이제는 원로원 질서를 회복할 중심인물로 등장한 것이다.

물론 폼페이우스가 갑자기 카이사르의 적이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치적 위치는 분명히 달라지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군단을 지휘하며 자신의 군사적 명성을 확대하고 있었다. 반면 폼페이우스는 로마에 머물면서 원로원과 협력하여 정치적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두 사람 사이에 새로운 긴장을 만들어 냈다.

특히 원로원에는 카이사르를 오래전부터 경계해 온 정치인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카토였다.

카토는 공화정의 전통적 질서와 원로원의 권위를 중시했으며, 카이사르가 집정관으로 재임하던 시절부터 그의 정치적 행동에 강하게 반대했다.

카이사르와 함께 기원전 59년 집정관을 지냈던 비불루스 역시 오랜 정치적 반대자였다.

다만 원로원 전체가 한목소리로 카이사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로마의 정치인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와 공화정에 대한 생각에 따라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

키케로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카이사르의 군사적 영향력을 경계하면서도 폼페이우스 측의 판단을 언제나 신뢰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카이사르가 로마에 돌아올 때 어떤 정치적 조건을 받아들여야 하는가였다.

폼페이우스는 점차 카이사르가 군사 지휘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입장에 가까워졌다.

카이사르로서는 과거의 동맹자가 이제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 셈이었다.

두 사람의 결별은 어느 하루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가족적 유대의 상실, 크라수스의 죽음, 서로 다른 정치적 기반, 군사적 영향력의 경쟁이 겹치면서 오랜 동맹이 점차 흔들리고 있었다.

5. 승리했으나 돌아갈 수 없는 장군 — 지휘권을 내려놓는다는 것

기원전 52년 알레시아에서 승리한 뒤에도 갈리아의 모든 문제가 즉시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남아 있던 저항을 진압하고 정복 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기원전 51년 무렵 갈리아의 조직적인 저항은 대부분 진압되었고, 그의 오랜 원정은 사실상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카이사르에게는 전쟁보다 더 복잡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로마로 돌아가는 문제였다.

당시 로마의 고위 정무관과 속주 총독에게는 일정한 범위에서 군대를 지휘할 권한인 임페리움이 부여되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군단을 지휘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권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지휘권은 영원히 유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지휘권을 내려놓고 일반 시민의 신분으로 돌아가면 정치적 반대자들의 기소에 노출될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59년 집정관 재임 당시의 정치적 조치와 갈리아 전쟁 수행 과정에서의 행동 등을 문제 삼는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카토를 비롯한 강경한 반대자들이 그를 법적으로 추궁하려 한다는 우려도 존재했다.

물론 카이사르가 귀환하는 즉시 유죄판결을 받거나 처형될 운명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재판 자체가 그의 정치적 지위와 명예에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그에게는 다음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여 정치적 지위를 이어 가려는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로마의 선거에 출마하려면 원칙적으로 정해진 절차를 따라야 했고, 군사 지휘권을 유지하는 문제와 충돌할 여지가 있었다.

카이사르는 로마에 직접 들어오지 않고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할 수 있도록 인정받았던 특례를 유지하려 했다.

반면 그의 반대자들은 그가 먼저 군대를 해산하고 정상적인 정치 절차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측의 주장은 모두 공화정의 법과 관행을 근거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법과 관행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달랐다.

카이사르에게 군대는 단순한 전쟁 수단만은 아니었다.

오랜 전쟁을 함께 치른 군단은 그의 군사적 명성을 뒷받침했고, 로마의 정치적 협상에서도 무시하기 어려운 힘이었다.

반대로 원로원 강경파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군사력을 가진 장군이 자신의 정치적 요구를 관철하려는 상황 자체가 공화정에 대한 위협으로 보일 수 있었다.

양측 모두 상대방이 먼저 힘을 내려놓기를 원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상대방을 충분히 신뢰하지 못했다.

갈리아의 전쟁은 끝나가고 있었지만, 카이사르가 로마로 돌아가는 길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

라벤나에서 기다리는 카이사르 이미지
라벤나에서 고민하는 카이사르와 예상 이동 경로를 상상으로 그린 지도(AI 이미지)

6. 로마에서 들려오는 소식 — 타협은 왜 어려워졌을까

기원전 50년, 카이사르의 군사 지휘권과 로마 귀환 문제는 원로원의 가장 첨예한 정치적 쟁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오랜 전쟁을 치렀고, 이제 그 지휘권을 언제 내려놓을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군대를 해산한다는 것은 단순히 군사적 임무를 마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지휘권을 내려놓고 일반 시민으로 돌아가면 정치적 반대자들의 기소에 노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원로원 강경파는 카이사르가 군대를 유지한 채 다음 집정관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상황을 경계했다.

양측의 불신은 깊었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전쟁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6-1. 서로 군대를 내려놓자는 제안

당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모두 로마의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권한의 근거와 처지는 서로 달랐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52년 단독 집정관을 지냈지만, 기원전 50년에는 이미 집정관 임기가 끝난 상태였다. 그럼에도 히스파니아 속주들에 대한 군사 지휘권을 계속 보유하고 있었으며, 현지의 군단은 부하 장군들을 통해 지휘하고 있었다.

반면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휘권의 종료 시점을 둘러싸고 원로원과 대립하고 있었다.

따라서 카이사르에게만 군대를 해산하라는 요구는 단순히 한 장군의 임기를 끝내는 문제가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군사적·정치적 힘의 균형과도 직결되어 있었다.

기원전 50년, 호민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모두 군사 지휘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쿠리오는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정치인이었다.

그의 제안은 비교적 단순했다.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라고 요구한다면 폼페이우스 역시 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 가운데 한쪽만 무장한 상태로 남는다면 다른 한쪽은 정치적으로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 측에서는 이를 공정한 조건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로원 강경파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갈리아에서 오랜 전쟁을 치르며 군단의 충성을 확보한 카이사르가 로마의 정치 질서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보았다.

폼페이우스의 군사력은 카이사르를 견제하고 공화정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여겼다.

물론 카이사르의 제안 역시 순수한 평화의 의지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폼페이우스의 군사적 우위까지 제한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 양측은 모두 공화정의 안전과 공정한 절차를 내세웠지만, 상대방이 먼저 힘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는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6-2. 원로원은 정말 전쟁을 원했을까

기원전 50년 12월 1일 무렵, 원로원에서는 주목할 만한 표결이 이루어졌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모두 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아피아노스와 플루타르코스 등 후대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제안은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아피아노스는 찬성 370명, 반대 22명으로 전한다.

이는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원로원 전체가 카이사르를 제거하기 위해 한목소리로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상당수 의원은 두 사람의 군사적 대립이 내전으로 번지는 것을 우려했고, 어느 한쪽도 군대를 이용하여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처럼 큰 지지를 받은 제안도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다.

당시 집정관 마르켈루스를 비롯한 강경파는 카이사르의 군사력을 먼저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카이사르의 지휘권을 종료시키는 문제와 폼페이우스의 지휘권을 유지하는 문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졌다.

결국 양측이 동시에 무장 해제하는 합의는 실현되지 않았다.

더욱이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향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긴장은 한층 높아졌다.

강경파는 폼페이우스에게 공화정을 방어할 준비를 요구했다.

아직 내전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치적 협상에서 상대방을 설득해야 할 사람들이 점차 군사적 대비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6-3. 폼페이우스는 왜 물러서지 않았을까

폼페이우스에게도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로마에서 가장 명성 높은 장군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동방 원정의 승리와 정치적 영향력은 그의 권위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면서 두 사람의 군사적 명성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았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과 협력하여 로마의 정치 질서를 유지하는 위치에 있었고, 카이사르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단을 거느린 채 로마 밖에 머물고 있었다.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의 군사력을 경계할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카이사르 역시 폼페이우스가 군대를 유지한 채 자신에게만 지휘권 포기를 요구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한때 서로의 정치적 성공을 도왔던 두 사람은 이제 상대방이 가진 힘을 자신의 미래에 대한 위협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에는 개인적 경쟁뿐 아니라 공화정의 권력구조 자체가 안고 있던 문제가 있었다.

로마의 제도는 강력한 장군들이 각자의 군대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 대립하는 상황을 평화롭게 해결하기에 충분한 신뢰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6-4. 마지막 편지와 원로원의 강경한 결정

기원전 49년 1월 1일, 카이사르의 제안이 담긴 편지가 원로원에서 낭독되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면서 폼페이우스와의 군사적 지위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원로원의 논의는 다시 격렬해졌다.

폼페이우스의 장인인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비롯한 강경파는 카이사르가 정해진 기한까지 지휘권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이사르 측을 지지하던 호민관 안토니우스와 카시우스는 이에 반대했다.

로마의 호민관에게는 원로원과 정무관의 일정한 조치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중요한 권한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거부권마저 정치적 충돌의 중심에 놓였다.

기원전 49년 1월 7일, 원로원은 국가의 안전을 위한 비상조치인 이른바 ‘원로원 최종 권고’를 채택했다.

이 조치는 국가가 중대한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할 때 정무관들에게 공화정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카이사르 측은 이러한 조치가 자신의 정치적 권리와 호민관의 권한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강경파는 카이사르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여겼다.

호민관 안토니우스와 카시우스 등은 로마를 떠나 카이사르에게 향했다.

카이사르는 훗날 자신의 『내전기』에서 이 사건을 자신에 대한 부당한 공격과 호민관 권리 침해의 증거로 제시했다.

다만 그의 기록은 내전의 당사자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한 것이므로, 그 주장 전체를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정치적 타협을 위한 논의가 이어졌음에도 결국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6-5. 라벤나에서 기다리던 카이사르

이 무렵 카이사르는 이탈리아 북동부의 라벤나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로마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논쟁을 모르고 있지 않았다.

자신을 지지하는 정치인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원로원의 결정과 폼페이우스 측의 움직임도 전달되고 있었다.

카이사르에게는 아직 군단이 있었다.

그 군단은 갈리아에서 오랜 전쟁을 함께 치른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로마의 정치적 갈등에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카이사르가 언제부터 군사행동을 최종적으로 결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가 처음부터 내전을 계획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고,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평화로운 해결만을 기대했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다만 기원전 50년부터 이어진 협상과 대립은 그가 군사행동을 현실적인 선택지로 고려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이제 로마의 정치적 갈등은 말과 표결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지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지휘권을 내려놓고 정치적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군대를 이용하여 자신에게 불리한 정치적 결정을 뒤집으려 할 것인가.

그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 결과는 자신 한 사람에게만 머무르지 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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