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알레시아 공성전 — 카이사르는 왜 두 겹의 성벽을 세웠을까

알레시아공성전

들어가며 — 포위한 군대가 포위될 때

기원전 52년, 갈리아의 알레시아.

언덕 위의 성 안에는 로마에 맞서 일어난 갈리아 연합군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이끄는 사람은 베르킨게토릭스였습니다.

그리고 성 밖에는 그를 뒤쫓아온 카이사르의 군대가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알레시아를 포위했습니다. 성 안의 사람들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도랑을 파고 목책과 망루를 세우며 안쪽을 향한 거대한 방어선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갈리아 각지에서 베르킨게토릭스를 구하기 위한 대규모 구원군이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이제 로마군은 성 안의 적과 바깥에서 다가오는 적 사이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포위하던 군대가 오히려 포위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또 하나의 성벽을 세웠습니다.

하나는 성 안을 향하고, 다른 하나는 바깥을 향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왜 퇴로를 찾는 대신 스스로를 두 개의 전선 사이에 세웠을까요.

1. 갈리아를 하나로 모은 사람, 베르킨게토릭스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의 유력 공동체인 아르베르니족 출신의 귀족이었습니다.

카이사르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켈틸루스는 한때 갈리아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왕권을 추구했다는 이유로 동족에게 처형되었습니다.

아들 베르킨게토릭스 역시 처음부터 순탄하게 지도자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52년 반로마 봉기를 일으키려 하자 자기 공동체 내부에서도 반대에 부딪혀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모아 다시 돌아왔고 결국 아르베르니족의 지도권을 장악했습니다.

이후 여러 갈리아 공동체가 로마에 맞서기 위해 그를 연합군의 최고지휘관으로 선택했습니다.

물론 모든 갈리아인이 하나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 편에 남은 공동체도 있었고, 각자의 이해관계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싸운 여러 해 동안 만났던 저항 가운데 가장 넓고 조직적인 연합이 형성된 것은 분명했습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용맹만 믿고 정면대결을 고집한 지휘관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로마군의 약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수만 명의 군대는 매일 엄청난 양의 식량과 말의 사료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군이 이용할 수 있는 농촌과 식량을 없애는 초토화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정면에서 군단과 부딪치기보다 보급을 어렵게 만들고, 갈리아 기병의 장점을 이용해 로마군을 괴롭히려 했습니다.

카이사르에게 베르킨게토릭스는 단순히 병력이 많은 적장이 아니었습니다.

로마군이 어떻게 싸우는지를 이해하고 그 약점을 공격하려는 상대였습니다.

기원전52년 카이사르와 베르킨게토릭스의 이동과 알레시아 공성전
기원전52년 카이사르와 베르킨게토릭스의 이동과 알레시아 공성전 상상도(AI 이미지)

2. 알레시아로 들어간 베르킨게토릭스

전쟁은 카이사르에게도 순조롭지만은 않았습니다.

게르고비아에서는 로마군이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기병전에서는 카이사르가 데려온 게르만 기병이 힘을 발휘했고, 베르킨게토릭스는 결국 알레시아로 후퇴했습니다.

알레시아는 오늘날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알리즈생트렌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천연 요새였습니다.

그런데 알레시아는 베르킨게토릭스의 아르베르니족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만두비족의 도시였습니다.

왜 만두비족이 베르킨게토릭스와 그의 대군을 성 안으로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는 사료가 자세한 설명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자발적인 연대였는지, 갈리아 연합군의 군사적 결정이었는지, 다른 사정이 있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베르킨게토릭스와 그의 군대가 알레시아로 들어갔고, 카이사르가 그들을 따라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천연 요새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대신 다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성을 통째로 가두는 것이었습니다.

3. 카이사르는 왜 성을 공격하지 않고 땅을 팠을까

카이사르의 기록에 따르면 알레시아 안의 베르킨게토릭스 군대는 보병 약 8만 명 규모였습니다.

정확한 병력 숫자는 카이사르 자신의 기록에 크게 의존하므로 그대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카이사르의 로마군 역시 대략 10~12개 군단을 중심으로 한 수만 명 규모였던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로마군의 힘은 병사의 숫자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로마 군단병은 전투원이면서 동시에 거대한 공병 조직의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들은 행군을 마치고도 땅을 팠고, 도랑을 만들었으며, 흙을 쌓고 목책과 망루를 세웠습니다.

카이사르는 그 능력을 알레시아에서 극단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성 안의 군대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안쪽을 향한 포위선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베르킨게토릭스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병을 성 밖으로 내보내 갈리아 각지에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막연하게 ‘혹시 구원군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닙니다.

외부의 대군이 올 가능성을 전제로 대비해야 했습니다.

카이사르는 병사들에게 장기간 버틸 식량과 사료를 준비하도록 하고 또다시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반대 방향이었습니다.

성 안이 아니라 바깥을 향한 방어선이었습니다.

고고학적 조사와 연구를 토대로 오늘날 알레시아 일대의 안팎 방어시설 전체 규모는 약 40킬로미터에 이르렀던 것으로 설명됩니다.

카이사르는 스스로를 두 개의 성벽 사이에 가둔 셈이었습니다.

4. 그는 두렵지 않았을까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질문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카이사르는 두렵지 않았을까.

카이사르의 기록에 따르면 갈리아 각지에서 모인 외부 구원군은 보병만 약 24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 숫자는 그대로 믿기 어렵고 실제 규모는 지금도 논쟁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알레시아 성 안에도 대규모 병력이 있었고, 바깥에서도 로마군보다 훨씬 큰 갈리아 연합군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가 그 위험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철수하지 않았을까요.

자존심 때문이었을까요.

수많은 승리를 거치며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믿게 된 것일까요.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보면 다른 모습도 보입니다.

그는 들판으로 나가 거대한 구원군과 무작정 정면승부를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땅을 팠습니다.

도랑을 만들었습니다.

목책을 세웠습니다.

망루를 만들었습니다.

병력을 배치하고 식량을 준비했습니다.

어쩌면 카이사르는 두려움이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려고 했던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없앨 수 없는 위험을 하나씩 계산하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구조로 바꾸려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용기란 두렵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해야 할 일을 찾아내는 능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알레시아 공성전의 이중 방어선
알레시아 공성전의 이중 방어선 상상도(AI 이미지)

5. 마침내 두 개의 성벽이 동시에 공격받다

갈리아 구원군이 도착했습니다.

카이사르의 기록에 나타난 숫자는 20만 명을 훨씬 넘습니다.

그들은 알레시아를 둘러싼 로마군의 외곽 방어선을 공격했습니다.

성 안의 베르킨게토릭스도 움직였습니다.

이제 카이사르가 두 번째 성벽을 세우면서 예상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안과 밖에서 동시에 공격받는 것입니다.

첫 공격에 이어 야간 공격까지 이어졌지만 로마군의 방어선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갈리아군은 로마 방어선 가운데 지형상 취약한 곳을 찾아냈습니다.

베르킨게토릭스의 친족인 베르카시벨라우누스가 정예병을 이끌고 외곽 방어선의 약한 지점을 집중 공격했습니다.

동시에 성 안의 베르킨게토릭스도 병력을 이끌고 로마군의 안쪽 방어선을 공격했습니다.

알레시아 전투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높은 곳에서 전황을 살피며 위험한 곳으로 병력을 보냈습니다.

라비에누스가 버티던 곳까지 위태로워지자 예비병력을 투입했고, 마지막에는 자신도 붉은 지휘관 망토를 입고 전선으로 향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기병이 갈리아 구원군의 측후방으로 돌아 들어갔습니다.

전세가 바뀌었습니다.

앞에서는 로마군의 반격을 받고 뒤에서는 기병이 나타나자 갈리아 구원군의 전열이 무너졌습니다.

베르카시벨라우누스는 생포되었고 구원군은 패퇴했습니다.

카이사르는 큰 전과를 기록하지만 구체적인 피해 숫자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점을 감안해 조심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닙니다.

알레시아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군사력이 무너졌다는 사실입니다.

6. 성 위에서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다

그 광경을 성 안의 사람들도 보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갈리아 각지에서 모여든 군대였습니다.

그들이 로마군의 방어선을 뚫어주기만 하면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 안에서도 동시에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구원군이 무너져 달아났습니다.

이제 베르킨게토릭스에게 남은 선택은 거의 없었습니다.

식량은 부족했습니다.

민간인까지 성 밖으로 내보낸 상태였습니다.

로마군의 포위망은 여전히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구하러 온 군대마저 사라졌습니다.

다음 날 베르킨게토릭스는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카이사르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전쟁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공동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공동체의 결정에 맡겼습니다.

자신을 죽여 로마인에게 넘기든, 살아 있는 채로 넘기든 그들이 결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장면에서 잠시 베르킨게토릭스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는 카이사르의 적이었습니다.

카이사르에게는 반드시 꺾어야 할 반란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승자와 패자의 이름을 잠시 내려놓고 한 인간으로 바라보면 다른 모습도 보입니다.

그는 패배가 분명해진 순간 자기 군대와 사람들 뒤에 숨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카이사르가 남긴 기록에서 그는 실패의 마지막 대가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기보다 자기 자신을 내놓았습니다.

전쟁을 시작한 사람에게는 전쟁의 결과를 책임져야 할 몫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화려한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카이사르 앞에 나타나 무기를 벗어 던졌다는 유명한 장면은 훨씬 뒤에 쓰인 플루타르코스 등의 전승입니다.

카이사르 자신의 기록은 훨씬 담담합니다.

무기를 내놓으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지도자들이 나왔으며 베르킨게토릭스가 넘겨졌다고 적었을 뿐입니다.

실제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연출이 없더라도 그의 마지막 선택이 가진 무게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베르킨게토릭스의 항복
베르킨게토릭스의 항복 상상도(AI 이미지)

7. 그런데 성벽 사이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알레시아의 승리를 이야기하면서 지나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두비족 사람들입니다.

알레시아는 그들의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도시 안으로 들어온 갈리아 연합군과 함께 로마군의 포위망에 갇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식량이 부족해졌습니다.

결국 성 안에서는 싸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내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카이사르는 만두비족 사람들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성 밖으로 쫓겨났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로마군의 진지 앞으로 갔습니다.

먹을 것을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노예가 되어도 좋으니 받아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그들을 로마군 방어선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군사적인 이유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수만 명의 로마군 역시 식량을 아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성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다면 성 안의 식량은 더 빨리 고갈될 것입니다.

포위전이라는 군사적 계산 안에서는 냉정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판단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계산이 이해된다고 해서 그 계산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고통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 안에서는 싸울 수 없다는 이유로 밀려났습니다.

성 밖에서는 적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 전쟁의 방향을 결정할 힘도 없었던 사람들이 두 개의 성벽 사이에 남겨졌습니다.

8. 인간 카이사르 — 위기를 구조로 바꾼 사람

알레시아에서 카이사르가 보여준 능력은 놀랍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카이사르 혼자 생각하고 혼자 이루었다고 보는 것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곁에는 라비에누스를 비롯한 여러 부장과 군단 지휘관, 백인대장들이 있었습니다. 넓은 방어선 곳곳에서 동시에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직접 지휘할 수는 없었습니다. 실제로 마지막 전투에서도 라비에누스를 비롯한 지휘관들이 각자의 전선을 맡아 싸웠고, 카이사르는 전체 전황을 살피며 위험한 곳으로 병력을 이동시켰습니다. 주요 지휘관들로는 티투스 라비에누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가이우스 파비우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등이었습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지휘 아래 각자의 위치에서 로마군의 방어선을 지휘하였습니다.

어쩌면 카이사르의 진짜 능력은 모든 것을 혼자 생각한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뛰어난 부분을 가진 지휘관들을 곁에 두고 그들에게 상당한 권한을 맡기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전체 전장을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 데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알레시아의 승리는 한 사람의 천재성만으로 이루어진 승리라기보다, 카이사르가 오랜 전쟁을 거치며 만들어 온 군단의 조직력과 지휘체계가 함께 만들어 낸 승리라고 보는 것이 더 가까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직의 맨 위에서 카이사르가 한 일은 위험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위험이 커질수록 도랑을 파고, 성벽을 세우고, 병력을 배치하고, 자신이 가진 사람과 조직의 능력을 필요한 곳에 집중시켰습니다.

그는 위기를 구조로 바꾸었습니다.

그 능력 덕분에 로마군은 성 안과 성 밖의 적을 동시에 상대하고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알레시아는 그 능력의 또 다른 얼굴도 보여줍니다.

카이사르가 만든 성벽은 자신의 병사들을 살리는 방패였습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는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이었습니다.

같은 지성과 같은 조직력, 같은 합리적인 판단이 누구의 편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보호가 되기도 하고 억압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결정을 천재적인 선택이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그것은 놀라운 군사적 판단이었습니다.

하지만 방어선 한 곳이 무너졌다면 우리는 그것을 무모한 도박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성공했다는 사실이 판단의 탁월함을 보여줄 수는 있어도 그 과정의 모든 선택까지 옳았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질문

알레시아에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지휘하는 사람들을 살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물러서지 않고 두 겹의 성벽을 세웠습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모든 희망이 사라진 뒤 더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보다 자신의 운명을 공동체의 손에 맡겼습니다.

한 사람은 승리했고 다른 한 사람은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승리와 패배라는 결과만으로 두 인간의 모든 선택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두 사람의 거대한 결단 사이에는 이름조차 제대로 남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만두비족의 노인과 병약한 사람들, 여자와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카이사르처럼 거대한 방어선을 세울 군단도 없었고, 베르킨게토릭스처럼 전쟁과 항복을 결정할 권한도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알레시아의 성벽은 동료를 살리는 방패였고, 누군가에게는 조국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어느 쪽으로도 들어갈 수 없는 벽이었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판단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순간은 악의를 품었을 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내가 옳은 목적을 위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나의 계산에서 빠져나간 누군가가 그 대가를 치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알레시아에서 카이사르는 승리했습니다.

그 승리를 가능하게 했던 거대한 방어선은 이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의 판단력과 로마 군단의 조직력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벽 사이에는 어디에도 들어가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알레시아의 두 겹 성벽을 바라보며 나 자신에게 묻게 됩니다.

나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세운 나의 방어선이 누구를 지키고 있는지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그 방어선 바깥에, 나의 합리적인 선택 때문에 아무 곳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서 있는 사람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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