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 봉인이 풀린 문서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습니다.
그가 죽은 뒤 로마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암살자들은 공화정을 구했다고 주장했지만, 시민들은 곧바로 그들에게 환호하지 않았습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브루투스의 연설을 들은 시민들은 침묵했습니다. 카이사르를 애도하면서도 브루투스를 존중하는 듯한, 어느 쪽으로도 쉽게 기울지 않는 침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카이사르가 남긴 유언장이 공개되면서 로마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유언장에는 재산을 물려받을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로마 시민들에게 남긴 선물도 있었습니다.
죽은 카이사르는 더 이상 명령을 내릴 수도, 군대를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남긴 한 장의 문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고, 로마 정치의 새로운 갈등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죽음 이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는 왜 아직 열여덟 살에 불과한 옥타비우스를 선택했을까요.

1. 세 사람의 상속인,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름은 하나였습니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자신의 재산 가운데 4분의 3을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에게 남겼습니다.
나머지 4분의 1은 루키우스 피나리우스와 퀸투스 페디우스에게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옥타비우스가 물려받은 것은 재산만이 아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그를 자신의 가문과 이름을 이을 사람으로 지정했습니다.
이 젊은이가 훗날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결과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카이사르가 미래의 황제를 미리 알아보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 옥타비우스는 아직 정치적 경험이 부족한 청년이었습니다. 군단을 지휘한 명장도 아니었고, 집정관을 지낸 정치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카이사르는 무엇을 보고 그를 선택했을까요.
나는 먼저 가문이라는 문제를 생각해 봅니다.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가장 유서 깊은 귀족 가문 가운데 하나인 율리우스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가문이 여신 베누스의 후손이라는 전통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이름과 가문을 이어갈 사람을 선택하는 일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카이사르에게는 로마에서 정식 혼인으로 얻은 아들이 없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카이사리온이 있었지만, 그가 로마에서 카이사르의 법적 후계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카이사르는 가까운 혈연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이어갈 사람을 찾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혈연만으로 옥타비우스를 선택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카이사르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능력과 성품을 판단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가문의 이름을 이어갈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감당할 만한 자질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2. 카이사르는 옥타비우스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수에토니우스는 젊은 옥타비우스가 병에서 충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위험한 여정을 거쳐 히스파니아의 카이사르를 찾아갔다고 기록했습니다.
카이사르는 그 청년의 행동력뿐 아니라 성품까지 높이 평가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일화는 흥미롭습니다.
옥타비우스는 단순히 명문가의 젊은 친척으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행동으로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카이사르가 그에게서 무엇을 발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총명함이었을까요. 용기였을까요. 어려움을 견디는 인내심이었을까요.
어쩌면 이 모든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더 생각해 봅니다.
카이사르는 이미 완성된 정치가를 찾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곁에서 성장시킬 수 있는 사람”을 찾았던 것은 아닐까요.
그는 군대를 훈련시키고, 인재를 발탁하며, 정치적 동맹을 형성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카이사르라면 젊은 옥타비우스에게 부족한 경험을 자신이 채워 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옥타비우스는 카이사르가 준비하던 파르티아 원정에 앞서 아폴로니아에 머물며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카이사르가 장기간에 걸친 후계자 육성 계획을 세워 놓았다는 확실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옥타비우스의 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이름을 물려주기로 한 청년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부자연스럽지 않을까요.
3. 가문의 계승과 정치적 유산은 별개의 문제였을까요
카이사르는 이미 로마의 최고 권력자였습니다.
그에게는 막대한 재산과 군사적 명성, 정치적 인맥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퇴역병과 지지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가 죽는 순간 모두 옥타비우스에게 자동으로 이전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재산은 유언으로 물려줄 수 있지만, 정치적 권력은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카이사르는 자신의 가문과 정치적 유산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나는 이 두 가지가 그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가문의 이름을 이어갈 사람이라면 자신이 평생 쌓아 올린 정치적 기반도 이어받기를 기대했을 수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살아 있었다면 옥타비우스에게 군사적 경험을 쌓게 하고, 공직에 진출할 기회를 마련하며, 자신의 측근들과 관계를 맺도록 이끌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개혁을 이해하고 이어가기를 바랐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실제로 어디까지 계획했는지, 옥타비우스에게 어떤 정치적 역할을 기대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옥타비우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키우려 했을 가능성과, 로마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설계해 놓았다는 주장은 서로 다릅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젊은 친척에게 자신의 재산과 이름을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그 선택 속에 어떤 기대가 있었는지는 역사 속에 남겨진 질문입니다.

4. 옥타비우스가 물려받은 것은 영광만이 아니었습니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때 옥타비우스는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아폴로니아에 있었습니다.
그는 카이사르의 죽음과 자신이 상속인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가족들은 유산을 받아들이는 일에 신중하라고 권했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카이사르의 이름은 로마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위험한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름을 받아들이는 순간 옥타비우스는 카이사르의 지지자뿐 아니라 정적들과도 마주해야 했습니다.
안토니우스와 같은 강력한 정치인이 있었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처럼 카이사르를 제거한 사람들도 살아 있었습니다.
젊은 옥타비우스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정치적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상속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카이사르의 선택과 옥타비우스의 선택을 구별해야 합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받아들이고 위험한 정치의 세계로 들어간 것은 옥타비우스 자신의 결단이었습니다.
카이사르가 남긴 이름은 청년에게 문을 열어주었지만, 그 문을 통과하는 일까지 대신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5. 유언장에 남겨진 또 하나의 이름 — 카이사르도 사람을 잘못 보았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는 뜻밖의 이름 하나가 등장합니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
그는 갈리아 전쟁과 내전에서 카이사르를 위해 싸웠던 장군이자 오랫동안 신임을 받았던 측근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그를 제2순위 상속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정했습니다. 먼저 지정된 상속인들이 상속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여 자신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만큼 카이사르는 데키무스를 신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참으로 기이하게 전개됩니다.
데키무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했을 뿐 아니라, 암살 당일 불길한 예감으로 원로원 회의 참석을 주저하던 카이사르를 설득하여 회의장으로 향하게 한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사람이 바로 자신의 유언장에 이름을 올려놓았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데키무스가 유언장의 내용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그에게 상당한 신뢰와 호의를 베풀었다는 사실만큼은 여러 정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카이사르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카이사르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적의 전략을 꿰뚫어 보았고,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서도 놀라운 판단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믿었던 사람의 마음까지 정확하게 읽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토록 뛰어난 카이사르도 사람을 잘못 판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오랫동안 찾아왔던 인간 카이사르의 진정한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해서 인간의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카이사르도 결국 우리와 다르지 않은 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유언장은 재산을 물려주는 문서이면서 동시에, 그가 누구를 믿었고 그 믿음이 어떻게 배반당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기록이 되었습니다.
6. 로마 시민들에게 남긴 300세스테르티우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는 또 하나의 놀라운 내용이 있었습니다.
로마 시민들에게 각각 300세스테르티우스를 남기고, 티베리스강 주변의 정원을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수에토니우스와 아피아노스는 이러한 유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카이사르는 왜 시민들에게 재산을 남겼을까요.
자신을 지지해 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였을까요.
아니면 죽은 뒤에도 시민들의 기억 속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정치적 계산이었을까요.
나는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서로 다른 감정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는 살아 있는 동안 곡물 배급과 토지 정책, 축제와 각종 개혁을 통해 시민들과 직접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에게 시민들은 단순히 통치의 대상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지지해 준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감사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이름이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명예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감사의 마음까지 거짓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반대로 감사의 마음이 있었다고 해서 정치적 계산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선의와 명예욕은 반드시 서로 반대되는 감정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카이사르의 유언장에는 그 두 마음이 함께 담겨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7. 장례식에서 달라진 시민들의 마음
카이사르의 유언이 알려지고 장례식이 거행되면서 시민들의 감정은 크게 흔들렸습니다.
플루타르코스와 수에토니우스는 시민들이 카이사르의 상처 입은 시신과 유언의 내용을 접한 뒤 격앙되었다고 전합니다.
군중은 포룸에 즉석 화장더미를 만들었고, 일부는 암살자들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이 살해되는 비극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시민들이 돈에 매수되었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정책으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기도 했고, 오랜 내전과 정치적 갈등 속에서 불안하게 살아온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들에게 재산까지 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시민들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을 것입니다.
감사와 슬픔, 분노와 불안이 한꺼번에 밀려왔을지도 모릅니다.
안토니우스의 장례 연설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고대 사료마다 묘사가 다릅니다.
분명한 것은 카이사르의 죽음이 공화정의 평온한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암살자들은 한 사람을 제거하면 로마가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이 남긴 이름과 관계, 시민들의 기억까지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8. 카이사르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미래
나는 카이사르가 옥타비우스에게 유산을 남기던 순간을 생각해 봅니다.
그는 자신의 가문을 이어갈 젊은 친척을 선택했습니다.
그 청년이 총명하고 장래가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충분히 성장시킬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카이사르는 당시 쉰다섯 살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나이 계산으로는 쉰여섯 살 무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는 자신의 활동이 곧 끝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옥타비우스의 미래도 그 계획 가운데 하나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자신이 기대했던 시간을 얻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로마의 권력을 장악했던 사람도 자신의 남은 생애를 결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직접 가르치고 이끌었을지도 모르는 청년은 하루아침에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옥타비우스에게 거대한 이름을 남겼지만, 그 이름을 감당하는 방법까지 가르칠 시간은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훗날 카이사르와는 다른 방식으로 로마의 새로운 질서를 세웠습니다.
우리는 그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 자신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유언장을 작성할 때 기대했던 미래와 실제로 펼쳐진 역사가 얼마나 같았는지, 이제는 누구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맺으며 — 사람이 남기는 것은 무엇일까요
카이사르의 유언장은 단순한 재산 분배 문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자신의 가문을 이어가려는 마음과 젊은 친척에 대한 기대, 시민들과의 관계를 죽음 뒤에도 남기려는 뜻이 담겨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언장을 작성한 사람의 뜻과 그것을 받아든 사람의 삶은 언제나 일치하지 않습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이름을 물려줄 사람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길을 걸어갈지까지 결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와 후손에게 재산을 남기고, 이름을 남기고,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와 기대를 남깁니다.
때로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까지 다음 세대가 이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기대가 받는 사람에게는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옥타비우스는 그 이름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선택은 로마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그리고 내가 남기려는 것은 그들이 살아갈 힘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짊어져야 할 또 하나의 무게가 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