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모두가 비난할 때, 다른 말을 한다는 것
들어가며 — 사마천은 왜 황제를 믿었을까
기원전 99년, 한나라의 장수 이릉(李陵)이 흉노에 항복했습니다.
황제는 분노했고, 조정의 신하들은 패배한 장수를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다른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그는 이릉이 항복했다는 결과보다, 그가 어떤 싸움을 했고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태사령 사마천이었습니다.
그는 이릉과 특별히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이릉을 변호한다고 해서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마천은 왜 황제 앞에서 다른 말을 했을까요?
그저 정의감 때문이었을까요?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확신 때문이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마천은 자신이 알고 있던 황제를 믿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는 황제가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고, 다른 신하들과 구별되는 판단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 이릉의 패배 — 항복이라는 결과만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기원전 99년, 이릉은 약 5천 명의 보병을 이끌고 흉노 지역으로 진출했습니다.
『한서』 「이광소건전」에 따르면, 당초 이릉에게는 이광리(李廣利)가 이끄는 군대와 관련된 지원 임무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릉은 별도의 부대를 이끌고 흉노와 싸우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이광리는 한 무제가 총애했던 이부인의 오빠였습니다. 그는 황제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외척이자 군사 지휘관이었습니다.
반면 이릉은 명장 이광의 손자였습니다.
이릉의 군대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흉노 기병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습니다.
병사들은 적은 병력으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전투가 계속되면서 화살이 떨어지고 퇴로가 막혔습니다.
마침내 이릉은 항복했습니다.
『한서』는 이릉의 군대가 수많은 적을 상대하며 분투했다고 기록합니다. 다만 전투 규모와 전과에 관한 구체적인 수치는 당시 기록에 따른 것으로, 오늘날 모두 독립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항복은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장수가 적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개인의 명예뿐 아니라 국가의 군율과 체면에도 관계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이를 엄중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항복이라는 마지막 선택이 그 이전의 모든 용기와 공로까지 지워 버릴 수 있을까요?
이릉에게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물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책임을 묻는 일과, 그가 보여 준 분투를 인정하는 일은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마천은 바로 이 점을 이야기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2. 가까운 친구도 아니었던 이릉을 변호하다
사마천은 훗날 「보임안서(報任安書)」에서 이릉과 자신이 특별히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평소 술잔을 나누거나 각별한 우정을 쌓은 관계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마천은 이릉의 인품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하들에게 신의를 지키며, 국가의 어려움에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적은 병력으로 흉노의 대군에 맞서 싸운 일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사마천은 이릉이 죽지 않고 항복한 이유에 대해서도 훗날 한나라에 보답할 기회를 얻으려는 뜻이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이릉이 실제로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마천의 기대이자 추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사마천이 이릉의 항복을 단순한 비겁함이나 배신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여기에는 역사 기록을 담당했던 사마천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행동을 평가하려면 마지막 결과뿐 아니라 그에 이르는 과정, 평소의 행적, 당시의 상황까지 살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관점이 이미 사마천에게 얼마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훗날 『사기』에서 수많은 인물의 공과 과를 함께 기록한 그의 태도를 생각하면, 이릉을 평가했던 시선과 연결하여 살펴볼 만합니다.
사마천에게 중요한 것은 이릉이 패배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쳐 패배했느냐는 문제였을지도 모릅니다.
3. 황제의 질문 — 같은 말을 듣고도 다른 뜻을 생각하다
『한서』에 따르면, 이릉의 항복을 둘러싸고 조정에서 비난이 이어지던 때 한 무제는 사마천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황제가 어떤 표정과 말투로 질문했는지, 정확히 어떤 분위기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평범한 토론의 장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황제는 이릉의 항복에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신하들은 황제의 뜻을 살펴야 했습니다.
황제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가 자신의 정치적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오랫동안 조정의 권력관계 속에서 살아온 대신들은 황제가 어떤 답변을 기대하는지 민감하게 살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말은 해야 하고, 어떤 말은 삼켜야 하는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천은 달랐을 수 있습니다.
그는 권력의 중심에서 정치적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대신이라기보다, 역사와 천문, 역법을 담당하는 전문 관료였습니다.
황제가 이릉에 관한 의견을 물었으니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판단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이릉의 분투와 공로를 이야기할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황제에게 그 발언은 전혀 다른 의미로 들렸습니다.
『한서』는 황제가 사마천의 말을 이광리의 공을 깎아내리고 이릉을 두둔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어긋납니다.
사마천은 이릉을 평가하고 있었지만, 황제는 그 말을 이광리와 관련된 정치적 문제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사마천에게는 사실과 판단의 문제였지만, 황제에게는 권위와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였을 수 있습니다.
4. 사마천이 알고 있었던 황제의 또 다른 얼굴
그런데 사마천은 왜 황제의 반응을 충분히 예상하지 못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릉 사건보다 앞선 시기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원전 104년, 한 무제는 새로운 역법인 태초력(太初曆)을 시행했습니다.
사마천은 이 역법 개정에 참여했습니다.
태초력 개정은 단순히 날짜를 계산하는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국가가 사용하는 시간의 체계를 정비하고, 왕조의 제도적 질서를 새롭게 세우는 중요한 사업이었습니다.
한 무제는 이를 추진했고, 사마천을 비롯한 전문 관료들은 각자의 지식과 능력을 바탕으로 참여했습니다.
사마천은 이 과정에서 새로운 제도를 추진하는 황제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전문가의 지식이 국가 운영에 활용되는 경험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마천의 마음속에는 황제에 대한 어떤 신뢰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신이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고 올바른 판단을 제시하면 황제가 그 뜻을 이해해 줄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물론 태초력 개정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사마천이 황제를 깊이 신뢰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사건을 연결하여 생각해 보면 흥미로운 가능성이 드러납니다.
사마천은 자신이 경험했던 개혁의 황제를 믿고, 이릉 사건에서도 그 황제가 다른 의견을 받아들여 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는 황제에게 맞서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알고 있는 황제라면 자신의 충심을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를 개혁하는 황제와 군사적 실패 앞에서 분노하는 황제는 같은 사람이면서도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사마천은 그 차이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5. 올바른 판단과 정치적인 말하기는 다르다
사마천의 발언을 살펴보면 또 하나의 문제가 떠오릅니다.
그는 이릉의 인품과 전투 과정, 병사들의 분투를 적극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이미 이릉의 항복에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광리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외척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릉의 공로를 강조하는 말은 이광리의 군사적 성과를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하는 말로 들릴 위험이 있었습니다.
사마천도 이광리와 황제의 관계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토록 직접적으로 이릉을 옹호했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입니다.
다만 한 가지 가능성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마천은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판단을 어떻게 전달해야 황제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민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먼저 항복의 책임을 인정하고, 황제가 우려하는 군율과 국가의 체면을 존중한 뒤, 이릉에게도 참작할 만한 사정이 있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설명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황제의 분노를 피할 수 있었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또한 현전 기록만으로 사마천이 실제로 어떤 표현과 어조를 사용했는지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기에는 중요한 인간적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는 능력과, 그 판단을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전달하는 능력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마천은 뛰어난 역사적 식견을 지녔지만, 황제의 심리와 조정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읽는 데에는 능숙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가 세상 물정을 전혀 몰랐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신과 황제에 대한 신뢰가 정치적 위험을 헤아리는 감각보다 앞섰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마천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자신의 경험과 믿음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반응을 예상하는지를 생각해 보려는 것입니다.
6. 인정받고 싶은 마음보다 자신의 식견을 알아주리라는 믿음
사마천은 「보임안서」에서 자신의 직무에 힘쓰고 황제의 뜻에 부응하려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또한 황제가 이릉의 패배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이릉의 공적을 설명하여 황제의 마음을 넓히고 조정의 비난을 누그러뜨리려 했다고 적었습니다.
이 진술을 읽을 때 사마천에게 황제의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의 동기를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마천은 정치적 권력을 다투는 대신이 아니었습니다.
역사와 천문, 역법을 담당하는 전문 관료였습니다.
그런 그가 황제에게 자신의 식견을 보여 주고 싶었다면, 그것은 단순히 높은 지위를 얻거나 총애를 받으려는 욕망과는 달랐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내용을 황제에게 설명하고, 그 판단이 국가의 결정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태초력 개정에 참여했던 경험은 자신의 전문적 판단이 황제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황제가 다른 대신들의 비난과 구별되는 의견을 듣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황제가 자신에게 질문한 것 자체를 그런 기회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황제의 실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황제가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신하들의 동조를 기대했는지, 진심으로 다른 의견을 듣고자 했는지도 확인되지 않습니다.
다만 사마천은 자신이 황제를 돕는 말을 하고 있다고 믿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황제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판단을 바꾸려 했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을 황제가 알아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에 가까웠을지도 모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한 인간의 동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중요합니다.
7. 충성의 말이 불충의 말로 바뀌다
사마천은 이릉의 공로를 설명하고 황제의 판단에 다른 시각을 보태려 했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그 말을 다르게 받아들였습니다.
『한서』에는 황제가 사마천이 사실을 왜곡하여 이광리의 공을 깎아내리고 이릉을 위해 변론한다고 여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마천이 황제의 뜻을 거스르려 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보임안서」에 나타난 그의 회고는 자신이 충성의 뜻으로 발언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이 생깁니다.
자신은 황제를 돕는다고 생각했는데, 황제는 자신을 해치는 말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사마천이 황제의 마음을 정확히 읽지 못했다면 그것은 정치적 판단의 한계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황제의 마음을 잘못 읽었다는 사실이 곧 그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는 일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말을 전달하는 사람의 미숙함과 그 말을 처벌하는 권력자의 책임은 구분해야 합니다.
『한서』는 사마천의 발언이 처벌로 이어졌다고 전합니다.
그 과정은 훗날 사마천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데에도 깊은 상처로 남았습니다.
그가 당시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황제에 대한 믿음이 어느 순간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가 황제에게 전하려 했던 뜻과 황제가 받아들인 뜻 사이에는 돌이키기 어려운 간극이 생겼습니다.
8. 이미 시작된 역사, 아직 끝나지 않은 삶
이릉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사마천에게는 이루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사마담의 뜻을 이어 역사를 편찬하는 일이었습니다.
『사기』 「태사공자서」와 「보임안서」는 역사 편찬의 구상이 이릉 사건과 궁형보다 앞서 시작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사마천이 황제에게 복수하기 위해 처음부터 『사기』를 쓰기로 결심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아버지와의 약속이 있었고, 역사 기록자로서의 사명감이 있었으며, 자신의 학문적 포부도 있었습니다.
이릉 사건은 그 모든 것 위에 예기치 못한 시련을 가져왔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판단을 말하는 일과 황제에게 충성하는 일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현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사마천이 황제를 어떻게 바라보게 되었는지, 살아남는다는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는지는 아직 이야기할 때가 아닙니다.
그 문제는 다음 편에서 그의 형벌과 생존을 살펴보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 합니다.
마무리 — 그가 잘못 판단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사마천은 이릉의 항복을 변호했습니다.
그렇다고 항복이라는 행위가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 사람을 평가할 때 마지막 결과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걸어온 과정까지 살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판단은 충분히 합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그 말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사마천은 자신이 알고 있는 황제를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태초력 개정에 참여하면서 보았던 개혁의 황제, 전문 관료들의 능력을 활용하던 황제, 성실한 신하의 충언을 알아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황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사마천이 마주한 황제는 자신의 발언을 정치적 문제로 받아들이는 권력자였습니다.
사마천은 이릉을 평가하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말을 듣는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는 황제에게 반항하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알고 있는 황제를 믿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그의 삶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사마천이 잘못 판단한 사람은 이릉이었을까요. 아니면 자신이 믿었던 황제였을까요?
그 답을 그는 자신의 삶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주요 원전
-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 이릉의 출정, 항복, 사마천의 발언과 처벌 경위
- 『한서』 권62 「사마천전」 수록 「보임안서」 — 이릉에 대한 평가와 사마천의 자기 진술
- 『사기』 권130 「태사공자서」 — 사마천의 역사 편찬 동기와 태초력 관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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