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파르살루스와 폼페이우스

카이사르-폼페이우스

들어가며 — 적의 천막에 들어선 승자

기원전 48년, 그리스 테살리아의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로마인들이 서로를 향해 칼을 들었습니다.

한쪽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한때 로마의 권력을 함께 나누었던 정치적 동맹이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와 결혼한 사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두 사람은 서로의 생존과 권력을 걸고 싸우는 적이 되어 있었습니다.

전투가 기울자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진영으로 물러났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넋을 잃은 듯 천막에 들어갔다가 적군이 다가오자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달아났다고 전합니다.

얼마 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진영에 들어섰습니다.

그곳에는 승리를 확신했던 사람들이 마련한 화려한 식기와 장식, 잔치 준비가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승리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그들의 물건만 남아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적의 몰락을 보며 승리의 기쁨을 느꼈을까요.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먼저였을까요.

아니면 한때 자신과 함께 로마를 움직였던 사람의 몰락에서, 로마 공화정의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았을까요.

우리는 그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승리가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두 사람이 어떻게 이 평원에서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1. 히스파니아에서 그리스로 —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진군했습니다.

폼페이우스와 그를 지지하던 원로원 세력은 로마를 떠나 그리스 방면으로 철수했습니다.

카이사르는 로마와 이탈리아의 주요 지역을 확보했지만, 곧바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서쪽의 히스파니아로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폼페이우스의 부하 장군들이 지휘하는 상당한 병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 여름 일레르다에서 폼페이우스 측 군대를 항복시켰습니다. 이후 마실리아 문제를 마무리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와 정치적·군사적 기반을 정비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48년 초, 아드리아해를 건너 폼페이우스가 있는 그리스 방면으로 진군했습니다.

히스파니아에서 승리한 지 불과 몇 달 뒤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히스파니아에서의 전쟁과 달랐습니다.

카이사르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폼페이우스의 부하 장군들이 아니라 폼페이우스 자신이었습니다.

더구나 폼페이우스는 로마에서 철수한 뒤에도 자신의 세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동방에서 쌓아 온 군사적·정치적 기반을 활용하여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를 장악한 카이사르가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전쟁의 조건 가운데 상당 부분은 폼페이우스에게 유리했습니다.

2. 폼페이우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 패배 이전의 삶

여기서 잠시 폼페이우스라는 사람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 인물을 마지막 결과로 기억하기 쉽습니다.

카이사르는 승리한 사람이고 폼페이우스는 패배한 사람이라는 인식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삶을 처음부터 살펴보면 그를 단순한 패배자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106년에 태어났습니다. 카이사르보다 여섯 살가량 연상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군대를 지휘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시칠리아와 아프리카에서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고, 히스파니아에서는 세르토리우스 세력과 오랜 전쟁을 치렀습니다.

기원전 70년에는 크라수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습니다.

기원전 67년에는 지중해에서 활동하던 해적 세력을 대대적으로 제압했습니다. 이후 동방으로 진출하여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을 마무리하고 로마의 동방 지배를 재편했습니다.

그가 ‘마그누스(Magnus)’, 곧 ‘위대한 자’라는 이름으로 불린 데에는 이러한 군사적 업적이 있었습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명성을 쌓기 전부터 폼페이우스는 이미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장군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 역시 권력을 추구한 정치인이었습니다.

군사적 명성을 정치적 영향력으로 바꾸었고, 공화정의 제도보다 자신의 특별한 지위에 의존했던 측면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능력과 업적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의 마지막 실패를 알고 나면, 그가 이전에 이루었던 일들까지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폼페이우스가 파르살루스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패배가 그의 평생을 무능한 삶으로 바꾸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의 판단을 비판할 수는 있어도, 먼저 그가 어떤 능력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는지 공정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영광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영광들(AI 이미지)

3. 디라키움의 패배 — 로마를 차지한 카이사르는 왜 굶주렸을까

기원전 48년, 카이사르는 아드리아해를 건너 그리스에 상륙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처음부터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식량과 병력의 보급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로 군량과 병력을 보내려면 바다를 건너야 했습니다.

당시 폼페이우스는 해군력에서 우세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수송선 부족으로 처음부터 모든 병력을 한꺼번에 건너게 할 수 없었고, 이후에도 바다를 통한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반면 폼페이우스는 해상 보급로를 활용하여 여러 지역에서 식량과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였습니다.

군대는 용기만으로 싸울 수 없습니다.

수많은 병사에게 날마다 식량을 공급해야 하고, 말에게 먹이를 주어야 하며, 무기와 장비도 유지해야 합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보급 능력은 병력의 숫자만큼이나 중요해집니다.

카이사르는 디라키움 일대에서 폼페이우스의 진영을 육상으로 포위하려 했습니다.

그는 참호와 방어 시설을 구축하며 폼페이우스의 움직임을 제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육지에서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포위하고 있었지만, 바다에서는 폼페이우스가 보급상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카이사르의 군대는 식량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두 군대는 수개월 동안 진지를 구축하고 서로의 약점을 공격했습니다.

결국 폼페이우스의 군대가 카이사르의 방어선 일부를 돌파하면서 카이사르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는 전투를 계속하기보다 군대를 물려 테살리아 방면으로 철수했습니다.

카이사르의 패배였습니다.

우리는 앞선 글에서 카이사르의 대담함과 뛰어난 판단력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승리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상대의 능력을 잘못 판단할 수도 있었고, 자신의 계획이 예상과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었습니다.

디라키움에서 그를 패배시킨 사람은 바로 폼페이우스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생깁니다.

폼페이우스는 유리한 상황을 계속 유지하며 카이사르를 소모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결국 파르살루스에서 결전을 벌이게 되었을까요.

4. 승리를 서두른 쪽과 기다리려 한 쪽

폼페이우스에게는 카이사르보다 많은 병력과 강한 기병, 해상 보급의 이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카이사르를 굶주리게 하며 소모시키는 전략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진영은 단순한 군사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카이사르에 반대하는 원로원 인사들과 유력 정치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폼페이우스가 로마를 떠날 때 원로원 전체가 그를 따라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에 남거나 중립을 지키려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폼페이우스의 진영에는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카이사르와의 전쟁을 자신들의 정치적 생존이 걸린 싸움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카이사르의 『내전기』에는 폼페이우스 진영의 사람들이 이미 승리한 듯 전후의 관직과 처벌을 논하며 결전을 재촉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전에 한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를 남긴 사람은 승리한 카이사르입니다.

승자는 적군을 오만하고 분열된 집단으로 묘사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폼페이우스가 전투를 원하지 않았으나 주변의 압력에 밀렸다는 설명에도 어느 정도 사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확한 내면과 결정 과정은 알 수 없습니다.

그는 군사적으로 결전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장기간의 전쟁을 유지하는 데 따른 정치적 부담을 고려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폼페이우스는 그 결과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가진 정보와 조건 속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공정한 역사 읽기일 것입니다.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자신의 경험 많은 병사들을 활용했습니다.

그는 폼페이우스의 우세한 기병이 자신의 오른쪽 측면을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고 일부 보병을 뒤에 따로 배치했습니다.

폼페이우스의 기병이 전진하자 이 예비대가 맞섰습니다.

기병이 무너지면서 폼페이우스 군대의 측면이 드러났고, 카이사르는 그 틈을 공격했습니다.

결국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패배했습니다.

정확한 병력과 사상자 수는 고대 저자마다 다릅니다. 특히 카이사르 자신이 제시한 수치에는 승리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파르살루스가 두 장군의 운명을 갈랐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전투를 카이사르의 천재성과 폼페이우스의 무능함만으로 설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폼페이우스는 디라키움에서 카이사르를 패배시킨 장군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그 패배 이후에도 자신의 군대를 수습하고 다시 싸울 기회를 만들어 낸 장군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상당한 능력을 가진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마지막 대결은 더욱 비극적이었습니다.

디라키움과 파르살루스 지역 지도 이미지
디라키움과 파르살루스 당시 지역 지도(AI 이미지)

5. “그들이 원했다”라는 자기 변호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쓰러진 로마인들을 보며 다음과 같은 취지로 탄식했다고 전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되기를 원했다.”

이어 자신이 군대를 해산했다면 전쟁에서 세운 공적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유죄를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수에토니우스도 아시니우스 폴리오를 근거로 비슷한 말을 전합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내전기』에는 이 직접 발언이 없습니다.

따라서 실제 현장에서 카이사르가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전승은 카이사르가 자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는 내전을 자신이 선택한 전쟁이라기보다 적들이 강요한 생존 투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 설명에는 실제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휘권을 내려놓으면 기소와 정치적 몰락이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루비콘강을 건넜고,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으며, 내전을 계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선택의 책임까지 모두 상대에게 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 뒤에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이유를 찾습니다.

그 이유가 반드시 거짓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수많은 원인 가운데 자신을 덜 아프게 하는 이유를 앞세울 수는 있습니다.

카이사르는 승리한 순간에도 자신이 전쟁을 원한 사람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싸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듯합니다.

이것은 양심의 가책일 수도 있고, 정치적 선전일 수도 있으며, 두 마음이 섞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료는 그의 내면까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카이사르를 비난하기보다 인간의 자기변호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선택이 낳은 결과 앞에서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을까요.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까지 받아들이면서 과거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6. 패배자를 살려 두는 승리

파르살루스 전투 뒤 카이사르는 진영으로 달아난 병사들의 항복을 받아들였습니다.

『내전기』에서 그는 무릎을 꿇은 이들을 위로하고 생명을 보장했으며, 부하들에게도 그들을 해치지 말라고 명령했다고 기록합니다.

자신의 관용을 강조하려는 서술임을 감안해야 하지만, 많은 포로가 목숨을 건지고 일부가 훗날 카이사르 진영에 편입된 것은 그의 승리 방식이 단순한 보복과는 달랐음을 보여줍니다.

관용에는 인간적인 절제와 정치적 계산이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 시민을 대량으로 처벌하면 과거 술라의 공포정치를 되풀이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습니다.

살아남은 원로원 인사들을 용서하면 자신의 권력에 도덕적 우위를 더하고, 패자의 지지자도 새로운 질서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적을 없애기보다 자신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 만드는 힘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관용이 언제나 일관되게 나타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디라키움에서 패배한 뒤 테살리아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카이사르는 저항한 도시 곰피를 점령하고 병사들에게 약탈을 허용했다고 자신의 『내전기』에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관용을 단순한 성품의 문제로만 설명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적을 용서했고, 다른 상황에서는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카이사르의 관용은 인간적인 신념이었을까요, 정치적 필요에 따른 선택이었을까요.

아마 두 가지를 완전히 구별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더 중요한 문제를 발견합니다.

용서하는 자와 용서받는 자가 나뉘는 순간, 권력의 높이도 분명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공화정의 시민끼리 다툰 전쟁에서 한 개인이 누구를 살리고 받아들일지 결정했습니다.

관용은 잔혹함보다 나았지만, 동시에 법과 공동체가 맡아야 할 판단을 승자의 덕성에 의존하게 만들었습니다.

카이사르의 좋은 성품이 공화정의 약한 제도를 대신하는 역설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7. 폼페이우스의 마지막 — 이집트는 왜 그를 죽였을까

파르살루스에서 패배한 폼페이우스는 전장을 떠났습니다.

그에게는 아직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지역을 거쳐 이집트로 향했습니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어린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누이 클레오파트라 7세가 왕위를 둘러싸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 왕조와 맺어 온 오랜 정치적 관계를 바탕으로 도움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장군 중 한 사람이었고, 이집트 왕실과도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어린 왕과 그 측근들에게 폼페이우스의 도착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를 받아들이면 승리한 카이사르와 적대할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그를 거절했다가 폼페이우스가 다시 세력을 회복한다면 그 역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왕의 측근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따졌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포티노스, 테오도토스, 아킬라스 등이 이 문제를 논의한 끝에 폼페이우스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합니다.

그들은 폼페이우스를 죽이는 것이 카이사르에게 유리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계산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카이사르의 명령이었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폼페이우스가 이집트 해안에 도착하자 그를 맞이하기 위한 작은 배가 다가왔습니다.

그 배에는 과거 폼페이우스와 군사적 인연이 있었던 로마인 셉티미우스도 타고 있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배에 올라탄 뒤 살해당했습니다.

한때 로마 세계를 움직였던 장군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군대를 지휘했고, 지중해의 해적을 토벌했으며, 동방의 여러 왕국과 도시를 상대로 로마의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을 맞으러 나온 작은 배 안에서 자신의 생명조차 지키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승리와 패배가 인간의 삶을 얼마나 극단적으로 바꿀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폼페이우스가 파르살루스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은 그의 역사적 업적을 지워버리지 않습니다.

그의 마지막이 비참했다고 해서 그가 살아온 삶까지 초라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한 인간을 평가할 때 마지막 결과가 얼마나 강력한 선입견을 만들어 내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승리한 사람의 삶에서는 위대함을 찾으려 하고, 패배한 사람의 삶에서는 실패의 원인을 찾으려 하는 것은 아닐까요.

폼페이우스의 죽음과 카이사르의 눈물 이미지
폼페이우스의 죽음과 카이사르의 눈물 상상화(AI 이미지)

8. 카이사르의 눈물 — 슬픔인가, 정치적 계산인가

카이사르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뒤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플루타르코스와 카시우스 디오는 그가 폼페이우스의 머리와 인장 반지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사건이 일어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나 작성된 후대의 전승입니다.

그가 실제로 눈물을 흘렸는지,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남깁니다.

폼페이우스는 한때 카이사르의 정치적 동맹이었습니다.

그는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와 결혼한 사위이기도 했습니다.

율리아가 세상을 떠난 뒤 두 사람을 이어 주던 가족적 유대는 약해졌고, 정치적 갈등은 깊어졌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칼을 겨누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폼페이우스는 죽었고 카이사르만 살아남았습니다.

그 눈물이 진실이었다면 어떤 의미였을까요.

옛 동맹을 잃은 슬픔이었을까요.

자신의 딸과 연결되어 있던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애도였을까요.

로마의 위대한 장군이 외국 왕실의 정치적 계산 속에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였을까요.

아니면 자신이 시작하고 계속한 내전이 결국 어디까지 이르렀는지를 마주한 충격이었을까요.

그의 반응에는 이집트 정치에서 자신을 유리한 위치에 놓으려는 계산이 함께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느 하나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은 반드시 하나의 이유로만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슬픔과 안도, 연민과 정치적 계산이 한 사람의 마음속에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카이사르의 눈물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해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모두 정치적 연기였다고 단정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마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 역시 인간을 이해하려는 태도일 것입니다.

9. 승자의 기록에서 패자의 삶을 읽는다는 것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을 이해할 때 우리는 한 가지 어려움에 부딪힙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전쟁을 직접 기록한 『내전기』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가 자신의 입장에서 내전 전체를 설명한 기록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상당 부분 알 수 있지만,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는 제한적으로 알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승자의 기록이라고 해서 모두 거짓인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도 사실이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패자의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진실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기록했는지 살펴보고, 그 사람이 무엇을 강조했으며 무엇을 설명하지 않았는지 생각하는 일입니다.

또한 기록에 없는 부분을 우리의 선입견으로 함부로 채워 넣지 않는 일입니다.

나는 이번 파르살루스 전투를 살펴보면서 그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카이사르가 뛰어난 장군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폼페이우스의 능력을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폼페이우스의 비극적인 죽음에 연민을 느끼면서도 그의 정치적 판단과 책임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카이사르가 내전을 자신에게 강요된 전쟁이라고 설명했다고 해서 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도 안 되고, 그가 승리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책임을 그에게 돌려서도 안 될 것입니다.

“이해하는 것과 정당화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나는 역사를 읽을 때 지켜야 할 기본적인 태도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앞에서는 겸손하고, 승자와 패자에게는 같은 기준을 적용하며, 한 사람의 마지막 결과만으로 그의 인생 전체를 판단하지 않는 것 말입니다.

어쩌면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사람을 심판하는 일에 앞서, 내가 어떤 기준으로 인간을 판단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며 — 승리한 사람에게 남겨진 책임

파르살루스에서 카이사르는 승리했고 폼페이우스는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승리가 곧 정당함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패배 역시 한 인간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지는 못합니다.

카이사르는 승리한 뒤 패배자들을 용서했습니다.

그 행동에는 인간적인 절제와 정치적 계산이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내전이 자신에게 강요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설명에도 실제 두려움과 자기변호가 함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 눈물의 진실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경쟁하고, 때로는 이기고 때로는 패배합니다.

이긴 뒤에는 자신의 능력을 앞세우기 쉽고, 패배한 사람에게서는 그가 잘못한 이유부터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상대의 패배가 나의 모든 선택을 정당화해 주지는 않습니다.

또한 나의 승리가 상대의 삶을 평가할 권리까지 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는 이 글을 마치면서 카이사르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나 자신에게도 던져 봅니다.

“나는 승리한 뒤에도 그 과정에서 내가 한 선택의 책임을 바라볼 수 있는가.”

“그리고 한 사람의 실패를 보면서도 그가 살아온 삶 전체를 공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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