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3월 15일, 카이사르는 왜 자신을 지키지 못했을까

로마의 아침

들어가며 — 위대한 사람도 변하는가

인간은 살아가면서 변합니다.

가난했던 사람이 부자가 되면 생각이 달라지고, 권력이 없던 사람이 권력을 얻으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로마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가 된 카이사르는 어떠했을까요?

그는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판단력과 대담한 결단력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습니다.

갈리아를 정복했고, 루비콘강을 건넜으며,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했습니다. 달력을 개혁하고, 식민시를 건설하고, 로마의 오래된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습니다.

우리는 앞선 연재에서 그의 능력과 개혁, 그리고 패배한 적에게 베풀었던 관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았습니다.

그토록 현명했던 카이사르는 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죽음을 막지 못했을까요?

그는 위험을 몰랐던 것일까요?

아니면 위험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라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요?

이번에는 기원전 44년 3월 15일의 암살 사건을 통해 카이사르와 그를 죽인 사람들의 마음을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1. 로마 귀족들에게 공화정은 무엇이었을까

카이사르의 암살을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 로마 귀족들의 세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의 유력 가문들은 조상의 업적과 명예를 대단히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집정관을 배출한 가문은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후손들은 조상들이 쌓아 올린 영광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정치란 단순히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가문의 명성을 높이며, 후손들에게 더 큰 영예를 물려주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개인적·정치적 위엄을 ‘디그니타스(dignitas)’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독립적인 정치적 위엄입니다.

로마의 귀족 정치인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집정관이 되고, 총독이 되고, 군사령관이 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원로원 의원이 파트리키, 곧 전통적인 귀족 신분 출신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평민 출신의 유력 가문들도 원로원 정치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공통된 정치적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자신들도 로마를 다스릴 자격이 있다는 믿음입니다.

카이사르가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 역시 로마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집정관과 총독을 지낸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른 모든 정치인 위에 영원히 군림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다른 가문의 후손들은 자신의 능력과 명예를 펼칠 기회를 잃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카이사르의 권력 집중은 단순히 원로원의 권한을 줄이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로마 귀족들이 자신과 가문의 존재 가치를 확인해 온 정치적 질서를 뒤흔드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원로원 회의장 삽화
원로원 회의장의 모습(AI 이미지)

2. 관용을 베푼 사람과 관용을 받은 사람

카이사르는 내전에서 패배한 적들에게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술라가 보여주었던 대규모 정치적 숙청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술라의 시대를 경험한 카이사르는 숙청이 얼마나 많은 원한과 적대감을 남기는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카이사르의 관용을 오직 정치적 계산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에게는 불필요한 희생을 피하려는 신념도 있었을 수 있고, 옛 적들을 자신의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현실적 판단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역설이 숨어 있습니다.

관용을 베푸는 사람과 관용을 받는 사람의 마음은 반드시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카이사르는 적을 용서하면서 화해와 충성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용서받는 사람은 어떠했을까요?

어제까지 자신과 동등한 정치적 경쟁자였던 사람이 오늘은 자신의 생사와 정치적 미래를 결정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의 굴욕을 확인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로마 귀족들에게 정치적 위엄은 생명만큼이나 소중한 가치였습니다.

그렇다면 카이사르의 관용이 어떤 사람에게는 은혜였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정치적 종속으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관용은 상대방의 목숨을 살릴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마음과 신념까지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카이사르는 이 사실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3. 어제의 부관들이 오늘의 암살자가 되다

카이사르를 죽이려는 음모에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는 카이사르와 오랫동안 함께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갈리아에서 카이사르의 지휘 아래 군대를 이끌었고, 내전에서도 카이사르 편에 섰습니다. 기원전 45년에는 보충 집정관까지 지냈습니다.

그는 단순한 부하가 아니었습니다.

전쟁을 경험하고 로마의 최고위 공직까지 오른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카이사르를 배신했을까요?

그의 마음을 정확하게 기록한 자료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갈리아 전쟁 당시 트레보니우스에게 카이사르는 뛰어난 지휘관이자 자신의 정치적 성공을 도울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내전이 끝나고 카이사르가 종신독재관이 되자 두 사람의 관계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트레보니우스 역시 집정관을 지낸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앞으로도 카이사르의 결정에 의존해야 한다면, 자신의 정치적 독립성과 장래의 기회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는 카이사르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그에게 영원히 복종하고 싶지는 않았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확인된 심리가 아니라 그의 경력을 바탕으로 한 추정입니다.

하지만 공화정의 자유를 지키려는 신념과 자신의 정치적 위엄을 지키려는 욕구가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생각해 볼 만합니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도 있었습니다.

그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는 다른 인물입니다.

데키무스는 카이사르가 신뢰하던 군사 지휘관이었고, 그의 유언장에도 후순위 상속인으로 언급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암살 음모에 가담했습니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마지막 날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도록 설득하는 역할까지 했다는 전승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한 배신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인간관계를 마주합니다.

한때 같은 목표를 향해 싸웠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서로 다른 미래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4. 카이사르는 왕이 되려 했을까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로마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왕이 되려 한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따라다녔습니다.

그해 2월 루페르칼리아 축제에서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에게 왕관을 내밀었습니다.

카이사르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고대 기록에는 왕관을 거절했을 때 시민들이 환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장면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카이사르가 정말 왕권을 거절한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시민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한 정치적 시험이었을까요?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가 사전에 계획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연출이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습니다.

카이사르는 곧 파르티아 원정을 떠날 예정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동방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다면 어떠했을까요?

갈리아를 정복하고 내전에서 승리한 데 이어, 크라수스가 패배했던 파르티아까지 굴복시킨 영웅이 되었을 것입니다.

로마 시민들은 새로운 승리와 번영을 기대했을 것이고, 그의 정치적 권위도 더욱 강해졌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카이사르는 그때 자신의 권력을 새로운 형태로 확립하려 했을까요?

왕이라는 칭호를 받아들이려 했을 수도 있고, 왕이라는 이름 없이 실질적인 군주로 남으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최종 구상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이미 공화정의 전통적인 권력 구조를 크게 바꾸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카이사르에게 동방 원정은 자신의 미래를 완성할 기회였을 수 있지만,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미래를 막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을지도 모릅니다.

5. 현명했던 카이사르는 왜 위험을 피하지 못했을까

카이사르는 위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전쟁과 정치적 음모를 경험했습니다.

누가 자신을 미워하고, 누가 자신의 권력을 두려워하는지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적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보호하던 경호 인력을 해산했다는 기록도 전해집니다.

왜 그랬을까요?

나는 여기서 인간의 변화를 생각하게 됩니다.

젊은 카이사르는 수많은 위험 앞에서 신중하게 계산하고 과감하게 결단했습니다.

그러한 판단은 여러 차례 성공했습니다.

갈리아에서도, 내전에서도, 로마의 정치적 경쟁에서도 그는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성공은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처음에는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능력이 있으므로 어떤 위험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게 될 수 있습니다.

카이사르에게도 그런 변화가 찾아왔던 것은 아닐까요?

그는 자신의 능력과 업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만큼 로마를 개혁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자신감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 자신감은 실제 성과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다른 사람 위에 영원히 군림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서로 다릅니다.

카이사르는 그 경계를 충분히 헤아리고 있었을까요?

또한 그는 술라의 숙청을 되풀이하는 일이 정치적으로도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정적을 제거하면 새로운 원한이 생겨나고, 개혁과 원정에 사용해야 할 시간도 빼앗깁니다.

그렇다면 숙청보다 관용이 훨씬 나은 선택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판단에는 도덕적 신념과 정치적 계산이 함께 작용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관용을 베풀었다는 사실이 상대방의 충성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권력이 얼마나 강한지는 알았지만, 그 권력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는 잘못 판단했을지도 모릅니다.

기원전44년3월15일아침, 마지막 원로원 회의에 참석위해 걷는 카이사르 삽화
기원전44년3월15일아침, 마지막 원로원 회의에 참석위해 걷는 카이사르(AI 이미지)

6. 기원전 44년 3월 15일 — 마지막 원로원 회의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회의는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원로원 의사당이 아니라, 폼페이우스 극장에 딸린 회의 공간에서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그의 아내 칼푸르니아는 불길한 꿈을 꾸었고, 카이사르에게 외출하지 말라고 만류했습니다.

카이사르 역시 회의 참석을 미루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때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원로원 의원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꿈 때문에 회의를 취소한다면 어떻게 보이겠느냐며 카이사르를 설득했습니다.

카이사르는 결국 회의장으로 향했습니다.

자신이 신뢰하던 사람의 설득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가 회의장에 들어서자 원로원 의원들이 일어났습니다.

카이사르가 자리에 앉자 틸리우스 킴베르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추방된 형제의 귀환을 청원했습니다.

다른 의원들도 카이사르 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평소의 정치적 청원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킴베르가 카이사르의 토가를 붙잡아 끌어내렸습니다.

그것이 공격의 신호였습니다.

카스카가 먼저 공격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곧 여러 사람이 동시에 달려들었습니다.

그가 평생 싸워 온 적들은 갈리아의 부족들이었고, 폼페이우스의 군대였으며, 로마 밖의 수많은 적대 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를 공격한 사람들은 외국의 적군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로마의 정치인들이었습니다.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의 과거는 서로 달랐습니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내전에서 폼페이우스 편에 섰다가 패배한 뒤 카이사르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갈리아 전쟁부터 카이사르와 함께 싸우며 그의 신임을 얻었던 오랜 부하였습니다. 트레보니우스 역시 알레시아 공성전과 내전에서 카이사르를 도왔던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이들은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를 제거하려는 하나의 목적 아래 모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여러 차례 공격을 받은 끝에 쓰러졌습니다.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몸에 스물세 군데의 상처가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그는 카이사르가 공격을 받자 토가로 머리를 가렸다고 전합니다.

그날 아침, 카이사르는 어쩌면 로마의 미래를 생각하며 집을 나섰을지도 모릅니다.

그에게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습니다. 파르티아 원정이 기다리고 있었고, 자신이 구상한 로마의 미래도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날 원로원 회의장까지의 짧은 걸음뿐이었습니다.

그토록 먼 곳까지 군대를 이끌고 갔던 사람이, 정작 자신의 마지막 여정이 그토록 짧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조각상 아래 쓰러졌습니다.

한때 로마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던 폼페이우스.

그를 물리치고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던 카이사르가 이제 그의 조각상 아래에서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참으로 기묘한 역사의 장면입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거친 전장에서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폼페이우스의 대군을 무너뜨렸고, 로마의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마지막으로 쓰러진 곳은 적군의 창칼이 기다리는 전장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지배한다고 믿었던 로마의 한복판, 자신과 함께 나라를 다스려야 할 사람들 사이였습니다.

그가 쓰러진 자리에는 한때 자신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폼페이우스의 조각상이 서 있었습니다.

살아서는 폼페이우스를 이겼지만, 죽음의 순간에는 그 패배한 경쟁자의 발치에 쓰러진 것입니다.

그토록 많은 적을 물리쳤던 카이사르도 끝내 이기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로마를 지배하려 했고, 마침내 그 로마의 심장부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카이사르가 마지막 순간에 외쳤다는 말을 기억합니다.

“브루투스, 너마저!”

그러나 그가 실제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첫 공격 이후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전하면서, 일부 사람들이 그가 브루투스에게 그리스어로 말을 건넸다고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표현은 훗날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통해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순간에 그가 무엇을 말했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실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 가운데 한때 신뢰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쓰러진 회의장에는 더 이상 로마의 미래를 결정할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7. 카이사르를 죽이면 공화정이 돌아올 것이라 믿었을까

암살자들은 카이사르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정치적 결과가 곧바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브루투스는 암살 직후 원로원 의원들에게 말을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의원들은 두려움과 혼란 속에 회의장을 빠져나갔습니다.

암살자들은 공화정의 자유를 회복하려 했지만, 카이사르가 사라진 뒤 로마를 어떻게 안정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합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을 제거하면 그 사람에게 집중된 권력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만들어 놓은 정치적 현실은 그의 죽음으로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군대가 있었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의 개혁으로 이익을 얻은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암살자들 자신도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브루투스는 조상의 명예와 공화정의 자유를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카시우스는 카이사르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트레보니우스와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는 오랜 협력자였던 카이사르가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를 제한하는 존재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러한 동기들은 정확히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카이사르를 죽이는 데에는 뜻을 모았지만, 그 이후의 로마를 하나의 뜻으로 이끌지는 못했습니다.

공화정을 구하려는 행동이 오히려 새로운 내전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역사의 또 다른 역설입니다.

그들은 저마다 로마의 미래를 꿈꾸었지만, 누구도 역사의 마지막 주인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로마의 미래를 꿈꾸었지만, 누구도 역사의 마지막 주인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포룸 로마눔 AI 이미지)

이제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카이사르는 왜 자신을 지키지 못했을까요?

그는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갖추었고, 로마의 제도를 개혁할 정치적 역량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인간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성공을 거듭하면서 자신의 판단을 지나치게 신뢰했을 수도 있습니다.

관용을 베풀면 상대방도 자신을 따를 것이라고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동방 원정에서 승리하면 로마의 반대 세력도 결국 자신의 권위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반대로 암살자들은 자신들이 공화정을 구한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념 안에는 가문의 명예, 정치적 자부심, 잃어버릴지 모르는 권력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있었을 수 있습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능력을 확신했습니다.

암살자들은 자신들의 명분을 확신했습니다.

서로 다른 확신이 충돌한 끝에 남은 것은 한 사람의 죽음과 다시 시작된 로마의 혼란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카이사르의 오만이 암살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암살자들의 이해관계가 있었다고 해서 그들이 제기했던 권력 집중의 문제까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카이사르의 위대한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권력에 대한 욕망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공화정의 자유라는 암살자들의 명분을 이해하면서도 그들이 선택한 폭력과 그 결과를 따져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한 가지 얼굴만 가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며 — 그는 로마를 움직였지만, 사람의 마음까지 움직이지는 못했습니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운명을 바꾼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했고, 낡은 제도를 개혁했으며, 자신을 반대했던 사람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끝내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과 동등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자존심입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능력을 인정했을 수 있습니다.

그의 승리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영원히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미래를 완성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반면 암살자들은 그에게 더 이상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미래를 향한 출발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미래를 막기 위한 마지막 기회였던 것입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권력과 갈등, 그리고 로마의 미래를 둘러싼 다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죽음은 또 다른 역사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물어야 할까요?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은 그 업적을 근거로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할 권리까지 얻는 것일까요?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도 되는 것일까요?

어쩌면 카이사르의 마지막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과 신념을 확신하는 순간, 어디에서 멈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게 되는 것일까요?


다음 이야기 — 죽은 뒤에도 사람을 움직인 유언장

카이사르는 죽었지만 그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남긴 유언장은 한 젊은 후계자의 운명을 바꾸었고, 로마의 미래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카이사르는 죽음 이후에도 무엇을 남기려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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